(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더 갤러리 이번 회는 전시 ‘검은 기둥의 감각’을 기획한 고윤정 큐레이터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 얼마 전 종료된 전시 ‘검은 기둥의 감각’은 호반건설의 창작공간 지원사업인 ‘H아트랩’ 2기의 첫 번째 결과 보고전으로 고윤정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박관우, 신선주, 이연숙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의 주제와 작가 선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아트스페이스 호화는 호반문화재단에서 2022년에 만든 전시 공간으로 한국프레스센터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은 재단에서 기획한 전시가 열리는데 이번 ‘H아트랩’ 2기는 오픈스튜디오보다는 전시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계자분들과 상의 후에 결과 보고전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H아트랩’ 2기에는 두 명의 기획자와 5명의 작가가 입주해있다. 그래서 두 팀으로 나눠 전시를 준비했다. 다른 입주 기획자인 이경미 큐레이터와 상의하다가 내가 큐레이팅하는 첫 번째 전시는 등장인물이 거의 없이 상상에 의존하는 작업, 두 번째는 타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실제로 등장인물이 많은 작업으로 나누어 진행하게 되었다.
전시의 개념은 신선주 작가의 작업에 담긴 ‘검정’과 미묘한 긴장감을 주는 어둠에서 찾게 되었다. 신선주 작가는 1년 동안 레지던시에서 숙식하는 듯한 생활을 하면서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여러 번 만났고 이전 작업들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전작과 ‘H아트랩’에서 완성한 신작을 함께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신선주 작가는 검은 오일 파스텔로 손노동이 집약된 회화 작업을 하는데, 한 작품 당 몇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다양한 실험을 한 결과물을 보면 검은색의 결이 정말 다양하다. 또 ‘On(Grand Central Terminal)’(2023)을 보면 사람이 전혀 없는데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스릴러 영화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고 움직이지 않는 회화인데 영상 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건물 뒤편으로 여러 층위가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비밀은 대부분 CCTV를 통해 폭로되고, 몰래 지켜보기를 통해 사건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는 감시의 범위가 확장된 현대사회를 반영한다. 신선주 작가의 작업이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 개인적으로 아무 정보 없이 신선주 작가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수묵화인 줄 알았다. ‘먹인데 이렇게 진하고 두껍게 바를 수 있나?’ 생각하다가 오일 파스텔인 것을 알았다.
오일 파스텔을 꼼꼼하게 바르다 보니 먹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On(Grand Central Terminal)’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화폭의 아랫부분에서 크레용의 마티에르를 살렸다.
- 전시의 또 다른 키워드인 ‘기둥’은 어디에서 왔는가?
신선주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건축물의 가시적인 구조에서 기둥을 떠올렸다. 기둥은 박관우 작가의 작업과도 연결된다. 박관우 작가는 위조, 조작을 다룬다. 작가가 작년에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진행했던 ‘클럽 리얼리티’에서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원래 정체성 대신 무작위로 주어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화하고 행동했다. 참여자들은 11번의 워크숍 동안 자신이 만들어낸 누군가의 정체성을 상상하고 꾸며냈다. 그런데 은연중에 갑자기 진실을 말하거나 보여주게 된다. 나는 박관우 작가가 상황을 구축하는 기둥을 세우는 작업을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기둥을 세우면 참여자들이 함께 상황을 완성해나가는 거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검은 기둥의 감각’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연숙 작가가 기둥 사이사이의 공간을 채워나가는 역할을 해주었다. 참고로 두 번째 팀의 전시는 ‘하얀 벽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이경미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신창용, 조영주, 박관우, 신선주, 이연숙 작가가 참여한다. 두 전시의 연결성을 위해 의견을 많이 나누었고, 이경미 큐레이터가 제목에서도 운율을 맞췄다.
- 윈도우 갤러리에 설치된 박관우 작가의 작업은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 같다. 내용을 모른 채 시각적인 부분만 봐도 집중도가 높다. 영상에 등장하는 퍼포머들에게 어느 정도의 계획성과 즉흥성이 부여되었는지 궁금하다.
‘달콤한 꿈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2022)는 사람들이 2052년에 어디론가 강제로 이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가정하에 이주자 두 명의 이야기를 듣는 구성이다. 두 명의 배우에게 작가가 이주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심정 등을 인터뷰한 것이다. 이 작품은 ‘클럽 리얼리티’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작가가 제시한 가이드에 따라 대본 없이 참여자의 상상이 더해져 진행된 인터뷰라는 점과 ‘클럽 리얼리티’에 참여했던 배우가 연기했다는 점이다. SF 소설 같은 내용을 들려주고 이주의 상황에 대해 배우들이 장시간 동안 덤덤하게 고백하는데, 그것은 2052년에 일어난 가상의 어떤 사건을 마주한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클럽 리얼리티’가 그렇듯 중간에 자신의 진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허구와 가상,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는데 결과적으로는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 회화 작품이 전시된 공간까지 조명을 어둡게 처리한 것이 흥미로웠는데, 마치 연극 혹은 영화 세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공간 구성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인가?
이전에 아트스페이스 호화에서 진행된 전시들은 조명이 많이 밝았다. 작품을 더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검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조명을 정말 많이 떼어냈다. 조명을 어둡게 해서 회화 작품의 세부가 잘 안 보일 수도 있었는데 신선주 작가도 작품의 세부적인 요소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이는 것보다 관객의 몰입이 가능한 분위기를 원해서 시도할 수 있었다.
중앙에는 이연숙 작가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품을 놓았는데 상설로 전시되는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작품과도 잘 어우러졌다. 이연숙 작가는 원래 작가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에 기반해 작업해왔다. 화이트 큐브보다는 오래된 주택을 전시 장소로 만들고, 할머니의 이불이나 천, 경대 등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방금 말한 분위기의 작품들과 신작이 함께 전시되었다. 한복 천으로 족자를 만든 ‘검은 망각의 묘약을 위하여 - 꽃가라 따라서’(2023)나 벽 하나를 채운, 아래에 작은 종들이 달린 커튼인 ‘검은 망각의 묘약을 위하여 - 느슨한 그러나 단단한’(2023)이 여태까지 이연숙 작가의 작업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박관우 작가의 작품은 독립적인 공간에 놓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윈도우 갤러리를 선택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집중의 효과가 있었다. 전시장의 위치가 엘리베이터나 커피전문점 등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종일 오가는 곳인데, 갑자기 낯설고 이상한 분위기를 유발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전의 윈도우 갤러리가 전시의 일부 작품을 간단하게 보여주는 프리뷰의 역할을 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하나의 공공영역으로 작동해 프레스센터의 방문객, 커피전문점 이용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연적인 장소라는 것을 한 번 더 인식시켰다.
전체적으로는 ‘검정’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전시장이 그 자체로 ‘감각’을 전달하는, 매개적인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관객은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을 넘어 커튼 안으로 들어가 종소리를 듣거나 검은색에 희미하게 켜있는 불빛을 따라가면서 촉각적 감각을 고르게 느낀다.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작품 같은 느낌이 드는 전시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전시가 그에 관한 나의 궁금증을 일정 부분 해소해주었다. ‘정동’이라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관객의 참여가 반드시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져야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보통 레지던시는 작가들이 참여한다고 생각하는데 큐레이터와 평론가도 입주한다. 고윤정 큐레이터도 이번이 두 번째 레지던시 입주이다.
‘H아트랩’ 2기에는 나와 함께 이경미 큐레이터가 입주해있다. 금천예술공장에서는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들과 협업을 진행하는 프로젝트 팀 ‘플로우앤비트’ 소속으로 6개월 정도 있었다.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다 보니 어딘가에 소속되어 전시와 관련된 지원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독립된 나만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나 작가들과 한 공간에 머물며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레지던시에 입주했던 경력이 내가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홍보해 주기도 한다.
- 꽤 오랫동안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해왔다. 독립 큐레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시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타버스든 페스티벌이든 콘텐츠에 맞는 플랫폼을 개발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기만의 전공 분야가 있어야 경쟁력이 생긴다. 독립 큐레이터들을 보면 다양한 전시를 맡아서 진행하는 것과 별개로 자기만의 특화된 영역이 있다. 큐레이터도 작가 못지않은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영주 작가와 2019년 개인전 ‘젤리비 부인의 돋보기’, 2021년 ‘하나의 당김, 네 개의 눈’에 이어서 이번에 ‘작가 조사 비평사업’을 진행하게 된 것도 퍼포먼스라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퍼포먼스에 집중한 전시를 네 번 기획했다. 앞으로도 퍼포먼스가 접목된 전시를 기획할 것 같다. 관련해 최근 생각하는 이슈는 퍼포먼스와 관련된다고 해도 전시장에서 공연하는 것 같은 형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시장에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상황도 재미있지만 작년에 기획한 ‘두 비트 사이의 틈’(2022)처럼 퍼포먼스는 기계가 하고 작업에는 몸의 흔적만 남기는 것도 가능하다.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함을 느꼈던 전시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보다 독립 큐레이터가 많이 줄었다. 지역마다 미술관을 비롯해 관련 기관이 많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지만, ‘독립’이란 특성상 늘 경쟁에 노출되고 긴장감이 있는 것 같다. 작가들의 기획력에 감탄하고 자극받는 경우도 많다. 기관에 속해 있으면 기관의 성격에 따라 기본적으로 부여된 자본과 콘셉트가 있을 텐데,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면 매번 거의 무에서 시작하게 된다.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현장의 정보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들과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근래 들어 특히 큐레이터로서 나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최근에는 거대 담론이 필요 이상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 같아 힘을 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이고 작은 이야기도 사회적인 것과 잘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구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