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99) 작가 심래정] “기면 상태처럼 모호한 세상-작업 표현하고 싶었다”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기자 2023.12.22 15:40:55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더 갤러리 이번 회는 개인전 ‘심래정: 깨어나니 정오였다(DROWSY-HEAD)’를 진행한 심래정 작가를 인터뷰했다.

- 아라리오갤러리에서의 개인전 ‘깨어나니 정오였다’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그동안 그룹전 등을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지만, 4년 만의 개인전이고 시각적으로 변화한 부분도 보인다. 본인 스스로 느끼는 작업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동안 드로잉과 애니메이션에 기반한 작업이 많았다. 이후 드로잉에 나오는 이미지들을 실제 공간에 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B동 301호’(2019), 소제동 아트벨트에서 진행한 ‘바-스 하우스’(2020) 등에서 구조물을 제작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거의 다 2023년도에 작업한 신작이다. 그동안은 인간의 생존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작업에 풀어냈다면 이번에는 ‘기면’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놓았다. 기면 상태는 기면증과는 다른데, 병원에서 의사들이 환자의 의식 상태를 체크하는 5단계 중 2단계로 심한 졸음이 오거나 잠을 자다 옆에서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깨우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상태이다. 만약 기면 상태가 조금 더 진행되면 환청, 환시를 느끼는 섬망 증세도 동반하게 된다. 기면 상태의 졸리고 나른한 상태, 무기력한 상태 혹은 무언가를 분간할 수 없는 의식의 상태가 작업할 때의 나랑 닮은 것 같아 그런 상황을 은유하는 ‘깨어나니 정오였다’라는 주제로 진행하게 되었다.
 

심래정, ‘Sweetie-pie!!’, 2023, Acrylic ink on canvas, 60 x 60 cm, (c)Raejung SIM

-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게 되는, 좌측 벽에 차례로 걸린 네 점의 작품들은 심래정의 이전 작품처럼 세밀한 흑백화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지는 작품들은 큰 붓질, 넓은 색면이 두드러진다. 그동안은 색이 등장해도 하나의 강한 형광색이 두드러졌는데, 이번에는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다. 이미지 못지않게 색채와 표현 방식에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흑백 작품들은 종이에 잉크로 그렸고, 흑백 이미지 위에 그은 수직과 수평의 주황색 선은 스프레이를 사용했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작품을 차례대로 설명하면, ‘The Human Brains’(2022)에는 인간의 뇌 이미지, 뇌 수술할 때 사용되는 기구들이 그려졌다. ‘Tori’(2023) 속 새는 콘도르(condor)라는 머리 피부가 드러난 대머리독수리 종류인데, 맹금류 중에 가장 크다고 한다. 피부는 닭 볏이나 주름처럼 축축 늘어져 있어 비호감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새이다. 또 하이에나처럼 죽은 동물을 먹이로 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들을 가진, 공포감을 주며 인간을 압도하기도 하는 새가 나에게는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인간의 손 위에 올라간 콘도르를 그렸다. 또 ‘Hello’(2023)의 부엉이는 야행성, 밤에 잠을 자지 않는 동물을 대표한다. ‘Heck If I Know 1’(2023)은 내가 몰입해 그리다가 가끔 느끼는 최면에 걸린 듯한 착각, 착시를 표현한 것이다.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세밀한 드로잉이 중심이 된 작업을 진행해왔다. 확산지 - 간판 제작에 쓰이는 반투명한 필름지 - 에 그린 그림도 엄밀하게는 드로잉에 가깝다. 작업할 때 한 화면 앞에 오래 앉아 있게 되는데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조금 시원하게, 자유롭게 풀어내는 통로로 선택한 것이 페인팅이다. 또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기도 했다. 전시장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갈수록 더 최근에 그린 작품이다. ‘Sweetie-Pie!!’(2023)는 마지막 작업으로 어느 정도 붓의 사용에 익숙해진 게 보인다. 사실 2010년 이후로 물감과 붓으로 다양한 색을 표현하는 캔버스 회화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파노라마처럼 연결된 긴 호흡의 회화 작업을 해보고 싶다.

색 같은 경우는 워낙 원색이나 형광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형광색 안료가 든 물감과 잉크를 이것저것 써봤다. 흑백은 나에게 익숙한 색이고 색채는 아직 알아가야 하는 부분이라 호기심이 생기는 영역이다. 색채 표현에서는 다양한 그러데이션을 조금씩 시도하고 있다. 워낙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성격이라 관객들이 전시된 작품별로 혹은 단기간에 급속한 변화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시간적 간격을 두고 보면 변화가 발견될 것이다.
 

심래정, ‘Tori’, 2023, Ink, paint spray on paper, 79 x 110cm, (c)Raejung SIM
심래정, ‘The human brains’, 2022, Ink, paint spray on paper, 79 x 110cm, (c)Raejung SIM

- 물감과 잉크를 다양하게 사용했다고 말했는데, 캔버스 위에 올라간 물성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물감의 재질은 아니다.

아크릴 잉크다. 캔버스에 그릴 경우, 바탕에 두껍게 젯소를 칠하고 그 위에 작업했다. 캔버스 위에 그리는 작업이 오랜만이라 시행착오도 많았고, 덧칠하고 다시 그린 적도 많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Fat Cat’(2023) 같은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이전에 그렸던 이미지들이 살짝 비치는데, 결과적으로 무언가 숨겨져 있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스프레이를 사용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그래피티에서 영향을 받았다.
 

심래정, ‘No peeking’, 2023, Paint spray, acrylic ink, ink on paper, 145 x 112cm, (c)Raejung SIM 
심래정, ‘Heck if I know 2’, Acrylic ink, paint spray on canvas, 116.8 x 91cm

- ‘Heck If I Know 2’(2023), ‘Hat’(2023)을 보면 등장하는 캐릭터의 눈이 특이하다. 전자는 새까맣게 채워져 있고 후자는 눈, 코, 입이 각각 두 개씩 겹쳐있다.

시력을 잃은, 방향을 잃은 존재를 상징한다. 언젠가부터 안구에 문제가 생겨 치료와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사물이 두 개로 보이기도 하고, 심할 때는 한쪽 눈을 가리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내면적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원인으로 착시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눈앞에 있는 컵을 보고 만지고 있지만, 이게 정말 컵을 보는 것이고 만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지 반문하기도 했다. 두 작품은 당시 나의 신체적 증상과 그것에서 비롯된 상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전에도 인체를 많이 그렸는데 이번에는 특히 얼굴과 표정에 집중했다.
 

심래정, ‘Heck if I know 1’, 2023, Ink on paper, 110 x 79cm, (c)Raejung SIM

- 그래피티 이야기를 해서인지 화폭 위에 적힌 글귀에 시선이 간다. 어떤 기준으로 선택된 것인가? 그냥 생각나는 것을 적은 것인지 발견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전시된 작품에는 모두 영어가 적혀 있다. 영어가 한글보다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인가?

글자가 의미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주로 문학 작품에서 발췌했다. 내가 처음으로 발표한 애니메이션인 ‘Une Saison En Enfer(지옥에서 보낸 한 철)’(2010)은 불어인데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텍스트가 끝나는 곳에서 이미지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 ‘Double Room’(2023)은 우리에게 익숙한 심래정의 시그니처와 같은 특징이 모두 담긴 애니메이션이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봐서인지 복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여기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사람이 눈을 깜박이면, 눈동자가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그 눈을 받아먹고, 새로운 눈을 진흙에서 떠서 넣는 장면이다. 복시를 앓으면서 내 눈을 새 눈으로 갈아 끼우고 싶은 마음이어서 그것을 표현했다. 장작 위에 누운 인간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렸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직관적으로 내 상태를 담고 있다.
 

심래정, ‘Hat’, 2023, Acrylic ink on canvas, 60 x 60cm, (c)Raejung SIM

- 이번 전시를 본 관객들이 어떻게 감상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면 좋겠는가?

직전의 개인전 ‘B동 301호’ 때는 관객들이 전시장에 아예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극강의 공포감을 주고 싶었다. 전시장에 조명도 없었고 공포영화 수준의 사운드를 틀어놨다. 이미지와 음악, 공간의 분위기 모두가 작용해 실제로 전시장에 들어가길 꺼리는 관객들이 있을 정도였는데 내가 원하는 정도까지 도달하진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라는 게 없었다. 그냥 내가 조금은 나른하고 느슨한 상태에서 작업했다는 것이 전달되면 좋겠다는 정도였다. 특별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다 누구든 편하게 와서 관람하고, 재미있게 보다 갔으면 좋겠다.

- 심래정의 작업 중에는 어둡고 공포영화 같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들이 꽤 많다. 분해된 신체나 내장의 이미지도 등장한다. 그런데 공포 코미디(Horror comedy) 정도는 아니라 해도 위트와 유머러스함이 함께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저 무섭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사실 무섭게 만들겠다는 목표만 생각하면 더 잔혹한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었다.

내가 그리는 이미지들의 시각적 특성 때문인지 내가 원하는 만큼의 공포는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이미지들이 귀엽다고 느끼는 관객도 많다. 사실 극단적으로 공포스러운 얼굴들과 분위기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그것을 그리는 나조차도 이미지 속 인물들의 눈이 무서워서 중단했다.
 

심래정, ‘Come through for me’, 2023, Acrylic ink on canvas, 116.8 x 91cm, (c)Raejung SIM

- 앞서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회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자연히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된다. 심래정은 분업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그리고 모든 것을 혼자 하기 때문에 그 노동의 양과 시간은 상상 이상이다. 이전에 작가의 드로잉을 이어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오히려 두 번 일하게 된다고 말한 적 있다.

‘Double Room’은 아이패드로 작업해서 정확히 몇 컷으로 구성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애니메이션 작업은 정말 너무 힘들다. 눈뿐만 아니라 전신이 다 고되다. 실제로 몸이 아프면 심리적으로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쉬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재미있어서 결국 계속하게 된다. 고된 만큼 완성했을 때의 희열감이 크다. 결국 심래정의 작업이기에 내 드로잉과 설치, 애니메이션은 다 연결되어 있고, 애니메이션은 모든 것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계획하는 것은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완성까지 한 10년 정도 걸리더라도 꾸준히 하고 싶다. 물론 ‘팀을 꾸리거나 도와주는 사람을 구해볼까’라는 생각은 늘 하지만, 영상을 촬영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그린 드로잉에서부터 시작하는 애니메이션이고, 그 작업 과정이 복잡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그냥 내가 혼자 고생하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 마지막 질문이다. 작가 심래정을 어떤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가?

항상 인간을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파헤치고 싶어 하는데, 그건 정신의학적이고 육체적인 부분 모두를 포함한다. 그래서 내 작업에는 분해된 몸, 장기의 부분들도 등장한다. 관련해 살인과 관련된 사건의 현장들을 다루는 전공 서적을 참고하기도 한다. 다만 나는 사건의 전개, 해결 과정보다는 살인이나 폭력 사건의 현장, 인간이 자행한 폭력적인 상황의 이미지, 시신의 모습에 주목한다. 인간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인간에 대한 관심에 기반한다. 인간 존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늘 밝기만 하지 않다. 어두운 면과 잔혹한 면도 있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비극의 현장이지만 그것 역시 현실 속에 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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