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3 금호영아티스트 2부’에서 진행된 현승의 작가의 개인전 ‘평범한 ■씨의 휴가’를 실제로 가서 보기 전에는 목탄으로 그린 것이라 추측했다. 그런데 작품을 보니 한지, 먹, 목탄과 파스텔 등이 주재료였다. 그래서 먹만 사용했을 때보다 더 강한 검은 빛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두툼한 한지에 먹과 건식재료들이 쌓이다 보니 한지의 섬유질이 일어나는데 그게 화면의 무게감과 촘촘함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이합장지 위에 먹과 목탄, 검정 파스텔을 많이 쓴다. 처음에 먹을 세 번 정도 쌓은 다음 목탄과 파스텔 같은 건식재료를 올리고, 화면 위의 흰 부분에는 전통 동양화의 흰색 안료인 호분(胡粉)을 칠한다. 건식재료의 가루가 묻어나거나 날리면 안 되고, 묵직하게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마지막 과정에서 아크릴 바니쉬를 희석해 바른다.
- 작품 설명에 재료를 ‘복합매체’라고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특정한 재료들을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쓴다고 필요 이상으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 같아 하나하나 다 밝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내 작품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한지라고 생각해서이기도 하다. 한지는 내 감수성의 기본 바탕이다. 물론 내가 한지 외에 캔버스 같은 다른 바탕을 많이 써봤고 잘 안다고 말하긴 어렵다. 또 사람들은 한지가 예민한 재료이고 잘 쓰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한지는 내가 무엇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너른 마음으로 잘 표현해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다. 종이라기보다 섬유에 가까워 아주 튼튼하다. 무엇보다 한지 위에 작업할 때 아주 편안해진다. 그래서 한지를 좋아한다.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며 인사동의 지업사들을 많이 찾아다녔는데, 예전과 달리 150호, 200호 정도의 큰 장지들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한지를 만드는 장인분들이 나이가 드셔서 더 이상 생산이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 120호 한지를 살 수밖에 없었고 작품의 크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재료 산업이 무너지면서 전통 동양화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 한 작품에서 습식재료와 건식재료를 같이 쓰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먹과 목탄, 검정 파스텔은 같은 검은색이지만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처음에는 먹으로만 작업했고 구체적인 주제와 이미지가 아니라 산수화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상을 주로 그렸다. 이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 현실의 이야기들을 작업에 대입시키려 하다 보니 먹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무게감과 진하기의 지점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먹은 100% 스며들기 때문에 쌓아 올려진 밀도를 표현하는 데에 무리가 있다. 또한 먹은 내가 오랫동안 쓰던 재료라 그동안 작업하던 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속성이 전혀 다른 재료를 도입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그려내는 작업에 돌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동양화를 전공했다.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겠으나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장르와 매체의 구별 없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지만, 전공은 분명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학원 원장 선생님이 나에겐 동양화가 잘 맞는다고 추천하신 게 가장 큰 이유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다른 전공의 표현법도 조금씩 경험해봤으나 나에겐 동양화가 제일 잘 맞았다. 또 동양화의 기법과 재료, 미학은 전공하지 않으면 깊이 있게 배울 기회가 없다. 학교 다니면서 ‘이런 내용은 다른 어디에 가도 못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참고로 나의 어머니가 판화가이셔서 판화를 배우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내 작품에 목판화의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 전시 ‘평범한 ■씨의 휴가’에서 소개된 작품뿐 아니라 ‘박제된 낙원’(2020) 시리즈도 제주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주도는 관광지이고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 곳 같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편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 모두가 현승의의 작품에 담겨 있다. 환상적인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이미지)가 서로 충동하면서 함께 한다. 달콤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작품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그 계기가 있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제주도 출신이고 지금도 가족들은 모두 제주도에 살고 있다. 나 역시 대학 입학 이후 서울에 살게 된 거고, 그 이전에는 쭉 제주도에 살았다. 이와 같은 작업을 하게 된 데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사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대해 깊이 알고 고민하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사건들의 장소를 목격하고 들으며 자랐다. 관광 산업에 대한 문제의식도 어려서부터 갖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성장한 시기가 제주도에 큰 변화가 있었던 때라 생각한다. 어릴 때는 동네 앞 도로포장도 안 되어 있었는데, 순식간에 관광지화되었고 중국 자본도 들어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발전하고 파괴되었다. 관광 산업이란 게 결국 현지인들의 삶의 터전을 타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난개발 등 부작용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목격하면서 자라온 경험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반영되었다. 2019년 즈음부터 내가 보고 느낀 사회적인 현상들을 작업에 직접적으로 대입하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게 이런 작업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제주 4.3사건, 제주 제2공항, 제주의 환경과 관련한 문제들을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사회문화를 다루는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조사도 많이 해야 하고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된 데에는 의무감도 있었다. 나의 조부모님께서 제주 4.3사건 생존자셔서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대학원 시절에 제주도 지도를 까맣게 칠하는 게릴라성 퍼포먼스를 4월 3일에 맞춰서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겪은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나의 윗세대 작가분들은 민중 미술처럼 사건을 직관적으로 묘사하거나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하는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 두 세대나 아래인 내가 그처럼 다루면 기만적인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개인적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한 겹 씌운, 우회적인 작품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제주도가 얼마나 관광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내가 경험한 현상들을 다루면 자연스레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이야기들로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전시 ‘평범한 ■씨의 휴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점유된 낙원’(2023)과 ‘아쿠아리움 판타지’(2023)를 마주하게 된다. 두 작품에 관한 설명을 부탁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도가 관광지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이 희생되는지에 집중했다. 우리 모두를 지칭할 수 있는 익명의 인물인 ‘평범한 ■씨’가 제주도에 휴가를 와 누리는 것들이 무엇을 감내하고 이뤄진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점유된 낙원’은 제주도의 개발 구역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는 깃발에서 착안했다. 제주도에서 깃발은 개발 예정 구역을 의미하는데 깃발을 꽂는 행위가 마치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가볍고 유치하면서도 권력을 과시하는 폭력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또 관광지의 개발과 파괴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배경에 비행기가 반복적으로 착륙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비행기 소리를 듣게 하고 싶어서 애니메이션 작품인 <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2022)을 옆에 설치했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이 감내하는 부분을 함축하는 소음을 간접적으로 체험시키면 좋을 것 같았다. 한편 ‘아쿠아리움 판타지’에 등장하는 야자수는 제주도가 얼마나 잘 포장된 관광지인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야자수는 원래 제주도의 자생 식물이 아닌데 더 관광지처럼 보이게 인위적으로 식재된다. 야자수 뒤편의 수족관에는 물고기뿐 아니라 각종 인공적인 것들이 함께 들어가 있어 환경, 생태계 문제를 직관적으로 환기시킨다. 수족관 안의 생명체들은 사실상 죽어 있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그렸다. 최근 들어 특히 자연과 공존하는 도시이니 방문하라는 식의 관광지 홍보를 많이 한다. 그런데 과연 진정한 의미의 공존이 가능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입맛에 맞춰서 변형된 환경을 공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야자수와 수족관은 그에 대한 고민을 함축한다.
- ‘평범한 ■씨의 휴가 1, 2, 3’(2023)을 보면 중앙에 둥그렇게 독립된 공간이 있고 그 경계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 안은 현실과 분리된 꿈속 풍경 같기도 하고,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 같다.
‘평범한 ■씨의 휴가 1, 2, 3,’은 원의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안쪽은 ‘평범한 ■씨’가 휴가를 와서 누리는 것들이 의식주 세 가지로 표현되었고 바깥쪽은 내부의 것들을 위해 파괴되거나 사라지는 것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자본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며 그렸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 연결된다. 내가 무언가를 소비하면 나뿐만 아니라 무수한 영역이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의 결과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연결고리를 감추고 단순히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여 단절시킨다.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은 관계가 없으니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편하게 누리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주입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시각화하기 위해 원형의 내부는 마치 스티커가 붙은 것처럼 별개의 영역으로 표현했고, 원형을 꾸미는 꽃이라든가 영어 단어는 오직 장식을 위한 장치들이다. ‘꾸미는 것’은 관광 자본의 속성과 맞닿는다. 그리고 이 세 작품 좌우로 ‘Love & Peace 1, 2’(2023)가 놓이는데, 사랑과 평화는 중요한 가치이자 크고 넓은 함의를 지닌다. 그런데 관광지 홍보 문구에 남용되다 보니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두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가 흩어지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었다.
- 회화 작품 사이사이 애니메이션이 있고, 소리도 들리기 때문에 전시장 분위기에 변화가 생긴다. 주의 환기가 되어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스톱 모션(stop motion) 방식으로 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요즘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 대부분에게 해당하는 것일 텐데, 설치나 미디어 아트가 많은 상황에서 벽에 걸기만 하는 정적이고 고요한 작품을 넘어 전시장에서 다양한 체험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 나온 결과물이다.
- ‘The Smile Spot’(2023)과 ‘#_Viewpoint’(2020-2023)는 그 제목과 이미지에서 관광지에서의 사진 촬영을 연상할 수 있다.
‘The Smile Spot’은 포토 스팟이라고 보면 된다. 포토 스팟은 보통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설치되는데, 그렇게 아름답게 유지되는 풍경을 볼 때마다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마 현실과의 괴리 혹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화된 풍경 그 자체가 갖는 긴장감 때문일 거다. 이 작품에 그려진 풍경은 여러 풍경을 조합해 낭만이 극도로 비대화된 잡종적인 이미지이다. 또한 30개의 작은 작품이 모여 완성된 ‘#_Viewpoint’(2020~2023)는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원경의 이미지와 뭔지 알아보기 어려운 근경의 이미지 두 개로 나뉜다. 근경은 제주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신문 기사나 뉴스에 나오는 장면들을 확대해서 그린 거라 작가인 나에게 설명을 듣지 않으면 정체를 알 수 없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명확한 이미지와 불명확한 이미지의 간극을 말하고 싶었다. 관광객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며 기념 촬영을 하는 장소도 제주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장소에서 행복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이유는 그와 같은 현실(근경)의 풍경 - 제2공항 관련 농성, 동부하수처리장 증설을 반대하는 해녀 할머니들의 시위, 비자림로 공사 등 - 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원경에서 제주도를 보고 소비할 뿐이다. 관광지에서 얻게 되는 행복은 무관심 덕분이다.
- 현승의의 작업은 직관적이고 재현적이지만 상징적이다. 구체적인 이슈가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실제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어떤 기교도 없이 정직하게 그린 것처럼 보인다. 담백하게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 작품이다. 그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텐데 특별히 염두에 두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내가 솜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그리는 게 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작업 방식이나 분위기에 그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작가의 설명 없이도 어느 정도 그 느낌이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그러나 너무 직접적인 경우 작업의 의미나 관람객의 감상 폭이 좁아질 수 있기 때문에 우회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나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얼마 전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했고, 인천에 대해 리서치를 진행하고 그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려 계획하고 있다. 인천은 항구 도시이고 바다와 연결된 지역이며 섬과 갯벌이 많아 자연이나 환경 담론에 관해 이야기할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제주도와 닮았다. 제주도에 관한 작업이 내부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을 담고 있다면, 이번에는 외부인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것들, 관찰한 것들을 보여주려 한다. 한편에선 제주도에 대한 작업을 계속해나갈 예정이다.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주로 하다 보니 벌써 ‘언제까지 이렇게 작업할 수 있을까?’ 걱정할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젊으니, 체력이 있으니 지금 해야지’란 생각도 한다. ‘내가 제주도에 연고를 둔 작가라는 게 꾸준히 긍정적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 지금 드는 생각을 말하면, 지역성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담론을 담아내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느끼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