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03)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4년간 4부로 진행되는 ‘같고 또 다른 동양화 大기획’ 방향은?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기자 2023.12.22 15:41:26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더 갤러리 이번 회는 한국 현대 동양화의 현재를 보여주고 그 의미와 가능성을 모색하는 프로젝트 ‘아아! 동양화’를 기획한 이정배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총 4부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두 번째 전시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가 현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진행 중이다. 마지막 전시가 마무리된 뒤 참여 작가들과 진행한, 현대 동양화에 관한 인터뷰가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 현재 총 4부 중 2부 전시가 진행 중이다. 작년에 열렸던 ‘아아! 동양화: 열린 문’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양화의 매체를 사용하지 않는 작가”들이 참여했고 올해는 “동양화 매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통 회화와 다른 질서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전시이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작년에 이어 2부 전시까지 진행하면서 그동안 동양화에 부과된 클리셰와 같은 과제나 특성, 예를 들어 장르에 집중하고 고전에 천착하거나 현재와의 접점이 사라진 것 등이 오직 내부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동양화의 외부(감상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동양화의 원전성이 매우 강하고 ‘동양화는 이런 것’이라는 정의가 강력하게 작용한 영향도 있겠으나 그런 논리면 중국 송나라 이전에 동양화의 양식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들이 전통을 조금만 벗어난 행위를 하면 ‘동양화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활동을 동양화에 다시 한정시킨다. 그런데 실상 동양화의 전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양화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형식적 실험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서양화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챈다. 재현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양화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한다. 반면 동양화는 대상을 그리기 위해 대상이 된다. 대상과의 거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아아! 동양화: 열린 문’(2022)의 경우 동양화를 생각하는 전시인데 동양화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 동양화와 연관된 작가들이 참여했고, 그들이 매체를 바꿨다 해도 작품을 통해 동양화를 보는 듯한 감흥을 전한다.

한국의 미술은 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4년여의 기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국내 미술대학의 동양화 전공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런데 현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 중 우리가 전통 동양화라 칭하는 작업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작가가 거의 없었다. 이들을 통해 동양화를 배운 꽤 많은 졸업생이 신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야말로 ‘이게 무슨 동양화야?’라는 질문을 할 만하다. 동양화로서의 동양화가 아니라 회화로서의 동양화를 보여준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작가들을 보면 윗세대의 강령이나 교의로부터 자유롭고, 특히 동양화 재료를 ‘회화의 도구’로 사용한다. 따라서 앞으로 전통에 대한 첨예한 논의, 고증에 대한 의무를 떠나 회화의 한 줄기로서의 동양화가 자리 잡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 그러면 앞으로는 동양화가 아니라 회화로 부를 시대가 올 것이라 예상하는가?

큰 범주에서 회화에 속할 것이고, 그 안에서 동양화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큰 범주에서 회화, 작은 범주에서 동양화, 서양화로 나눌 수 있다. 동양화가 사라질 것이란 뜻은 절대 아니다. 원전에 기대는 동양화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게 가능할 것이란 의미이다. 동양화와 서양화는 화면의 점, 선, 면, 색으로 대상을 은유하는 회화임이 분명하나 그 둘은 구분 가능한 다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분리가 가능할 것이다.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 동양화라는 용어의 시작과 관련해 서양화와 구분이 필요했다는 점,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의 영향 등이 거론된다. 그 명칭과 관련해 동양화와 한국화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전시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에서는 한글로 ‘동양화’, 영어로는 ‘East Asian Painting’으로 표기했다.

동양화에서의 동양, 즉 한자 문화권에서의 동양은 한중일(韓中日)을 뜻한다. 사실 동양화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까지는 서화(書畫)라 불렸다. 글씨와 그림의 구분이 없었다. 잘 알다시피 동양화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에 작가들이 등단할 수 있는 대표적 통로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일본의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일본이 주입하는 한국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이후 일본은 일본화, 중국은 국화, 우리나라는 동양화라는 단어를 쓰다가 한국화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현재는 둘 다 사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동양화란 단어는 제국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바라보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용어를 이데올로기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미술 양식의 입장에서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문을 ‘East Asian Painting’으로 표기한 것은 기존의 ‘Oriental’이라는 용어가 추상적 지리 구분과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아시아를 대상화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기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또한 미술 양식 구분으로 극동아시아 3국만 이러한 미술 형태를 갖고 있어서이다. 미술은 형식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빼면 극동아시아 3국의 회화 양식이 남는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같은 재료의 사용이 있다. 그래서 2부 전시 때부터 영문을 ‘Oriental Painting’이 아니라 ‘East Asian Painting’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참여 작가, 관련 이론가들과 계속 논의하고 있다. 4부까지 전시를 마무리하면 꽤 많은 정리가 될 것 같다.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 동양화를 전공한 뒤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작업하는 작가들은 많다. 참여 작가 선정은 어떻게 했는가?

당연하겠지만, 내가 평상시에 눈여겨보던 작가들이다. 또한 ‘아아! 동양화’는 전시 못지않게 인터뷰가 중요하기 때문에 총 4부 전시를 놓고 볼 때, 20대부터 70대까지의 작가들이 골고루 참여하도록 했다. 세대별로 관심사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세대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일례로 20~30대 작가들은 현재 40대인 작가들까지 고민했던 동양화의 한국적 정체성이나 과제보다는 회화의 물성을 탐구한다. 2부 전시인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는 변화를 가져온 작가들에 주목하다 보니 40대의 비중이 크다. 한국의 회화는 1998년을 기점으로 많이 변했다. 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유입, 젊은 기획자와 비평가의 등장, 신생 갤러리와 대안 공간 등의 출현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때를 지나면서 현대 회화, 미술 속에서 같이 이야기될만한 작가들이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양화이기 이전에 회화로 읽힐 수 있는 작업을 보여주는 40대 작가들이 현재 동양화의 허리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서 유근택 작가가 선두에 속하고 권순영, 김선두, 김정욱, 손동현, 이진주, 정재호 등으로 이어진다. 참고로 2부 전시에 참여 중인 이성민 작가는 20대이다. 원래는 4부가 아니라, 5부로 기획했고, 제일 마지막 전시의 주제가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이었다. 그런데 5부로 진행하면 1년에 1부씩, 너무 장기간의 프로젝트가 되어버려 4부로 줄이고 2부에 이성민 작가를 포함시켰다.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 내년에 이어질 3부는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동양화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 4부는 “동양화를 전공했고 전통 동양화 매체로 전통 동양화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총 4부의 전시 주제가 매우 명확하다. 가장 선명한 분류이다. 혹시 ‘뉴 제너레이션’ 외에 생각했던 주제가 있었는가?

한국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동양화 전시는 시대를 나눈 뒤 각각의 시대에 작가를 배치한다. 나는 동양화를 다각도의 입장에서 그려내고 싶었다. 그 와중에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는 지점이 생기면 한국 미술계에서 동양화가 가지고 있는 입지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아이디어는 하나였다. 동양화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작가들과 동양화란 무엇인지 가감 없이 드러내 보는 전시였다. 그래서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님께 전시 계획을 말씀드렸다. 대표님께선 한발 더 나아가 단발성이 아니라 지속성 있게 진행하자고 제안하셨다. 나를 포함해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은 동양화라는 영역의 내부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동양화의 현재를 관찰할 수 있다. 내부에 머무르는 시선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기획자이기에 앞서 작가로서 다양한 방향으로 작업하는 동양화 작가들의 공통분모와 첨예하게 다른 표면(형식)의 예술 세계가 한자리에서 보여지면 정말 흥미로울 것 같았다. 따라서 동양화의 대안이나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이 전시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더 혼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충돌, 동양화에 관한 입장 차에 따른 마찰의 발생을 불러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오늘날 동양화가 어떤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앞서 말했듯 동양화를 전통으로 한정 짓는 태도에서 벗어나 회화의 한 장르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하는 정도라 말할 수 있다. 4부의 전시를 마무리한 뒤의 계획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구체적으로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데에는 작가로서의 활동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양화 작업을 하지 않는 작가를 소개하는 1부 전시 ‘아아! 동양화: 열린 문’에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에 관해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자연스러웠다. 2005년에 열린 첫 개인전 ‘그 서정적 그리움’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정말 깊게 고민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다. 두 번째 개인전 ‘분재가 된 풍경’(2006)을 마친 뒤 갤러리현대 윈도우 전시인 ‘욕망의 조각’(2010)까지 시간차가 꽤 있는데, 그때부터 작업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애초부터 동양화가 현대미술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동양화는 현대미술과는 다른 독립된 미술 현장에 존재했다. 그래서 현대미술 현장으로 들어오면 대화 자체가 안 되었다. 예술가는 현재를 드러내야 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시대, 사회)과 접점을 드러내는 게 당연한 일인데 당시 나의 동양화에는 그게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논리적인 개념을 구축하는 것보다도 앞선, 나에 대한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과도 긴밀하다.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기이다. 물론 그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양화뿐 아니라 작가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이다. 여하튼 당시 나는 현대미술 현장에서 작업하고 싶었고, 나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산수화로 작업하기로 마음먹고 동시대적 산수화로 주제를 옮겼다. 그러다 ‘산수를 썰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고, 입체와 회화의 차이를 알아보고 싶었다. 책을 통한 공부가 아니라 실질적인 나의 고민과 경험이 드러나는 작품을 원했던 거다. 한 4년을 고민했던 것 같다. 작가의 세계가 2차원에 드러나는 게 회화면 조각(입체)은 현실화시켜 실제 공간에 놓은 것이다. 내가 풍경을 썰어서 가져올 때는 2차원적으로 풍경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현실의 어떤 덩어리, 물질로 환원하는 것이다. 건축 설계 도면은 설계사의 생각이 드러난 것이고, 설계 도면에 근거해 만들어진 건축은 그것을 현실화한 것과 같다. 나만의 방식으로 산수를 드러내는데 나는 입체를 끌고 왔어야 했다. 이후부터는 회화에 머물 수가 없었다. 현재는 도시에 존재하는 자연 즉, 대도시의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자연, 도시계획과 관계된 자연 등 기하학으로 되어 있는 상황을 수집해 만들고, 색을 입히는 지점에 와있다.
 

‘아아! 동양화: 이미·항상·변화’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이정배

- 동양화에 대해,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원전에 기대는 현상이 강한 동양화이기 때문에 작가뿐 아니라 감상자도 그 원전을 벗어던지는 게 굉장히 힘들어 보인다. 이는 ‘나는 동양화를 잘 모른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작품에 대한 미감을 물어봐도 나는 잘 몰라서 할 말이 없다고 대답한다. 오늘날 서양미술에 비해 동양미술이 덜 익숙하고, 서로 다른 역사를 가져서인 것 같다.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든 감상자든 개인의 미감을 갖는다. - 물론 미,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논의 역시 쉬운 일은 아니지만 - 나만 해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즐겁게 작업한다. 안 그러면 작업은 고통이다. 작가가 작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크든 크지 않든 아름다움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동양화도 똑같다. 동양화, 심지어 미술을 전혀 접하지 않았던 사람도 정선(鄭歚)의 산수를 보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봐줬으면 좋겠다. 동양화의 회화성, 동양화와 관계한 작가들이 자신들의 화폭을 일구어가는 첨예한 지점들을 바라봐주길 바란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