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 ‘K-아트의 근원’ 겸재 정선을 들여다보다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과 손잡고 대규모 기획전 ‘겸재 정선’ 선보여

김금영 기자 2025.04.16 17:12:58

'인왕제색도'(왼쪽), '금강전도'가 전시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고(故) 이건희(1942~2020) 삼성 선대회장의 주요 컬렉션 중 하나로 꼽히는 ‘인왕제색도’가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곳에 걸렸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정립시킨 화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1676~1759)의 대표작으로,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뒤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의 모습이 실감 나게 표현됐다. 그리고 이 작품을 시작으로 정선의 방대한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자리 ‘겸재 정선’전 현장을 찾았다.

‘이건희 컬렉션’ 겸재 정선의 걸작들 한자리에

겸재 정선은 18세기 조선 회화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로, 전통 회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당시 화단을 주도했다. 사진=김금영 기자

K-아트의 근원이자 한국 회화사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정선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삼성문화재단(이사장 김황식)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영우)이 손을 잡았다. 특히 이번 전시는 올해 삼성문화재단 창립 60주년, 내년 정선 탄생 350주년을 맞아 정선을 주제로 열린 전시로는 사상 최대 규모로 꾸려졌다.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18개처의 기관과 개인의 소장품 총 165점(국보 2건, 보물 7건 57점, 부산시유형문화재 1건)을 선보인다. 아울러 정선의 지정 작품 12건(국보 2건, 보물 10건) 중 8건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았다.

정선은 18세기 조선 회화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로, 전통 회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당시 화단을 주도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관을 개성적인 필치로 그려낸 진경산수화를 정립해, 당대는 물론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담아내며,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겸재 정선'전 현장.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는 1, 2부로 나눠진다. 1부 ‘진경에 거닐다’에서는 정선을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의 흐름과 의미를 조명한다. 정선이 처음 그리기 시작하고 다양하게 변주한 금강산과 정선이 나고 자랐던 한양 일대를 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한다. 그 외에도 개성, 포항 등 다양한 지역의 명승지를 통해 정선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2부 ‘문인화가의 이상’에서는 진경산수화 외에도 문인화, 화조화 등 정선이 그린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정선의 예술 세계 전모를 비롯해 그가 지녔던 문인의식과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인왕제색도’ 등 정선의 대표작들 전시장 채워

이번 전시는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18개처의 기관과 개인의 소장품 총 165점을 선보인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 대표작으로는 앞서 언급된 인왕제색도가 빠질 수 없다. 인왕제색도는 고서화 보호를 위해 5월 6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돌아갔다가 11월부터 2027년 상반기까지 해외 순회전에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전시 이후 당분간 국내에서 보기 힘든 작품이라 특히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애정을 받기도 한 이 작품은 양감이 풍부한 암벽 처리, 농묵으로 능란하게 처리된 소나무들, 걷히는 비구름 밖으로 돋보이는 굴곡이 심한 산봉우리, 생동하는 전체의 경관 등에서 완숙한 경지에 오른 정선의 필치를 보여준다.

겸재 정선의 작품이 전시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인왕제색도와 함께 소개되는 ‘금강전도’ 또한 눈길을 끈다. 금강산은 정선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많이 그린 주제인데, 수많은 금강산 진경산수화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금강전도다.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이 담겼는데,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가 모두 한눈에 들어오도록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그려져 눈길을 끈다. 또한 정선은 뾰족한 암산과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을 오로지 점과 선만으로 뚜렷하게 대비시켜 표현했다.

‘청풍계(장동팔경첩)’의 경우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모두 전시한다. 정선이 76세경인 1756년에 제작한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의 ‘장동팔경첩’은 정선이 노년기에도 화법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더 원숙해진 필치를 보여준다. 정선은 80대 초반에 제작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장동팔경첩도 남겼다.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의 경관을 개성적인 필치로 그려낸 진경산수화를 정립해, 당대는 물론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김금영 기자

정선의 그림에서 오늘날의 흔적도 발견된다. ‘압구정(경교명승첩)’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강변을 따라 높은 언덕이 줄지어 있고, 주변으로 기와집, 초가집에 곳곳에 그려졌다. 압구정 앞 건너엔 중종 때부터 젊고 총명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하게 하던 독서당을 뒀던 두무개, 그 뒤로 짙은 녹색으로 그려진 남산에 눈에 띈다. 남산의 정상엔 큰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한국 전쟁 때까지도 이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정선은 글을 읽고 상상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아름다운 폭포를 그린 ‘여산초당’도 이 중 하나다. 당 나라의 시인 백거이(772~846)의 여산초당을 그린 이 작품에선 글을 읽고 시정과 화흥을 표현한 정선의 재치가 담겼다. 초당 뒤편의 대나무, 주변의 소나무와 향나무, 동구의 소나무를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렸는데, 혹시나 백거이의 여산초당임을 잊을까봐 동구 밖의 동자는 중국풍의 멜대를 어깨에 메고 초당으로 오르는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겸재 정선'전 현장. 사진=김금영 기자

행방을 알기 힘들었던 작품들도 전시된다. 정선이 임진강 적벽에서 뱃놀이하고 그린 ‘연강임술첩’이다. 정선은 총 세 벌을 그려 자신이 한 점을 갖고 연천현감 신주백과 관찰사 홍경보에게 각각 나눠줬는데 한 점은 행방을 알 수 없고, 홍경보본과 겸재본만 남았다. 이 또한 각각 개인 소장품이라 보기 어려웠는데,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두 벌을 동시에 전시한다. 정선의 관직 생활과 함께 주변인과의 교우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000원권 화폐 뒷면 그림으로 유명한 ‘계상정거(퇴우이선생진적첩)’도 볼 수 있다. 퇴계 이황 친필 ‘회암사절요서’와 송시열의 발문이 담긴 서화첩이다. 퇴계의 서문은 손자 이안도, 외손자 홍유형, 사위인 박자진에게로 이어졌다. 퇴계의 글을 송시열에게 보여주고 발문을 받은 박자진이 정선의 외조부다. 정선은 가문에 자부심을 갖고 이 서첩에 네 폭의 그림을 추가했다. 크기가 작은 화첩이지만,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전시는 '연강임술첩' 홍경보본과 겸재본을 함께 선보인다. 사진=김금영 기자

또 다른 대표 소재인 소나무를 담은 ‘사직송’도 눈에 띈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름을 유지하는 특성으로 인해 사대부들에게 높은 충절을 상징하는 소재로 여겨졌다. 동시에 십장생의 한 소재로서 장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나무만 단독으로 그려진 사례는 극히 드물었는데, 정선은 노송 한 그루만으로 화면을 채운 사직송을 남겼다. 이 밖에 정선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작품들도 전시장을 채운다.

전시를 기획한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이번 전시는 정선의 대표작인 진경산수화는 물론 사대부의 정취를 보여주는 관념산수화, 옛 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인물화, 화조영모화, 초충도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성취한 정선의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한다”며 “이를 통해 단순히 정선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조선 후기 회화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나무를 담은 '사직송'.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 통해 홍라희 명예관장 8년만의 복귀도 눈길

호암미술관 전경. 사진=삼성전자

특히 이번 전시는 한국의 양대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이 협력했다는 점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간송미술관은 보물 등을 포함해 79점을 호암미술관에 보냈는데, 조지윤 소장품연구실장은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내년 하반기 전시는 대구간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기도 하다.

삼성문화재단은 삼성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1910~1987) 회장이 도의를 고양하고 문화발전에 기여하고자 1965년 설립했다. 이병철 창업회장은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귀중한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을 막고자 적극적으로 문화유산을 수집했으며, 이를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해 재단 컬렉션의 근간을 이뤘다.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사진=대구간송미술관

간송미술문화재단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평생 수집한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헌신했으며, 1938년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설립해 대중이 전통문화를 향유하도록 했다.

호암과 간송은 모두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을 실천했으며, 일평생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이를 대중과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삼성문화재단 측은 “이번 전시는 두 선각자의 공통된 혜안이 겸재 정선이라는 한국 회화사의 거인을 중심으로 하나의 전시로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이 3월 31일 열린 이번 전시 개막식에 참석, 미술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명예관장으로서의 복귀를 알렸다. 홍라희 명예관장은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부인으로,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한 리움미술관 관장을 맡아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위’에 수년간 오르고, 세계적인 미술전문매체 ‘아트넷’이 선정한 세계 200대 컬렉터 목록에 해마다 이름을 오르는 등 막강한 입지와 인맥을 자랑해왔다.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유족들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도 홍 관장의 안목과 조언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 사진=연합뉴스

홍 명예관장은 지난 2017년 이른바 ‘국정 농단’ 사태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여파로 리움미술관 관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8년간 관장직은 공석이었고, 리움미술관 운영은 딸 이서현 운영위원장이 맡아왔다. 코로나19 사태로 1년 7개월간 휴관했던 리움미술관은 2021년 재개관한 뒤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 피에르 위그 개인전 등 해외 거장 전시를 기획해 선보였다.

삼성문화재단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정선 전시 개막에 맞춰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을 리움 명예관장으로 추대했다고 밝혔다. 홍 명예관장은 정선 전시 도록에 인사말을 직접 쓰기도 했다. 홍 명예관장의 복귀와 관련해 미술계는 침체된 미술 시장에 활력을 도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규모, 협력, 홍 명예관장의 복귀 등 여러 이슈로 특히 화제가 되고 있다. 전시는 호암미술관에서 6월 29일까지 열린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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