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 ‘향불 작가’ 이길우가 그린 인간 군상의 덩어리

선화랑서 4년 만에 개인전 ‘올 카인즈 오브 띵스(All kinds of things)’

김금영 기자 2025.07.02 11:58:14

선화랑 이길우 개인전 현장. 사진=김금영 기자

향불로 태운 무수한 점들의 흔적이 화면에 하나하나 자리 잡았다. 이 작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큰 덩어리를 구성했고, 이 덩어리들이 또 모여 거대한 인간 군상을 만들었다. 이 모든 군상은 각자 살아가는 삶의 치열한 현장이자, 개개인이 지닌 양면성이기도 하다.

앞서 프랑스 3인조 창작집단 ‘오비어스’의 전시를 통해 첨단 AI(인공지능) 기술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장을 만들었던 선화랑이 이번엔 전통 회화 전시로 상반된 매력을 전한다. 전통 회화의 형식성과 현대적 관점을 결합해 온 이길우 작가의 전시로, 4년 만에 선화랑에서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과거 중국 배우 판빙빙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해당 초상화가 유명해지면서 이후 사우디 알리드 왕자도 작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선 배우 이정현이 작가의 작품을 구입해 눈길을 끌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겹쳐 보이는 화면이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 ‘올 카인즈 오브 띵스(All kinds of things)’에서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일들, 즉 우리네의 초상을 다층적으로 들여다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특히 복잡한 인간관계와 양면성에 대한 아이러니에 주목한다.

작업의 영감은 참혹한 전쟁 현실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작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뉴스를 통해 접했는데, 아무런 잘못 없이 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유, 목적에서 이런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인지, 이런 상황을 자초한 인간의 욕망과 본성에 대해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작가의 시선은 바로 주변으로도 돌아갔다. 평소 작가는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데,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욕망이 뒤엉킨 일상 또한 전쟁과도 같았다고. 작가는 “우리는 각자의 삶을 하나의 전쟁과도 같이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작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부모의 자식으로서 열심히 살아왔다. 이렇듯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작가는 이 전쟁과도 같은 사람들의 일상이 사회가 바라는 좋은 직장, 경제적 여유 등 보편적인 삶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를 화면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표현했다. 작가는 “본래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색깔과 목표를 지닌 존재”라며 “그런데 치열한 경쟁 사회에 치여 살면서 목적과 가치를 상실한 듯 색도 획일화되고 무표정해지며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길우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힘든 상황도, 행복한 상황도, 복잡한 상황도, 슬픈 상황도 모두 마주하며 그럼에도 살아간다. 그래서 작가는 삶 자체가 아이러니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삶에서 피어나는 불행과 행복, 사랑과 증오 등 양가적이고도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느껴졌다고 한다.

작가는 “결핍이 있으면 욕망이 생기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나 자신도 작가로서, 가장으로서, 교수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내 삶에서 아이러니를 느낀다. 실제 성격은 내성적이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얌전해보이기도 하지만 내면엔 거친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다”며 “드로잉을 할 때 주변의 이웃 등 많은 사람들을 관찰했는데, 이들에게서도 하나로만 정의내릴 수 없는 다양한 양면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선화랑 이길우 개인전 현장. 사진=김금영 기자

실제로 ‘여행자’, ‘다른 시선의 관객’, ‘행인’, ‘이웃사람’ 등의 작품을 보면 화면 안에 남성과 여성이 중첩되거나 불분명한 국적의 인종과 연령대의 인간 군상이 겹쳐 보이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는 각자 다른 입장과 차별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는 동시에 이를 배척하지 말고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함도 이야기한다.

이런 인간의 다양성은 화면에서 오방색으로 표현된다. 작가는 향불 작업으로 사람의 이미지가 형성된 순지 전면과 교집합처럼 스케치한 사람들 사이에 겹치는 부분들에 오방색을 채웠다. 칠하지 않는 부분은 공간으로 남겨둔 채색한 장지 후면을 하나로 배접해 복잡한 구조를 형성했다. 이는 인간의 다양한 관계성을 시각화하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의 혼재된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작가는 “다소 무겁게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가 밝게 느껴지는 건 오방색을 사용한 덕분”이라며 “특히 황색, 노란색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부연했다.

“삶=아이러니” 그럼에도 살아간다

화면엔 오방색을 활용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길우는 ‘향불 작가’로 불린다. 그 시작은 2003년 가을 햇살 타들어가는 나뭇잎을 봤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당시 앞으로 작가로서의 방향성, 현실적으로 먹고사는 문제 등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였다. 작업실 앞 은행나무에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는데, 거기에 타들어간 은행잎을 보고 영감을 얻어 향불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향불 작업은 그야말로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하나의 밑그림을 향으로 태우고, 그 흔적을 또 다른 이미지와 배접해 화면을 재구성하는데, 한 작품 당 평균 3만 번 향을 태워야 하고, 작품 크기가 클수록 이는 더 늘어난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 작업을 이어온 건 헌신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다. 어머니는 일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세상에 향기를 남기는 향불의 이미지에서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떠올랐다”며 “희생을 하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이를 통해 세상에 이로움을 남기기도 한다. 향불 작업도 소멸을 통한 재생과도 같다. 이 점에서 아이러니 또한 느꼈다”고 작업에 자신의 삶의 철학이 담겼음을 밝혔다.

이길우 작가는 향불을 태우는 작업으로 알려졌다. 사진=김금영 기자

AI 등 첨단 기술이 예술 분야에도 활용되는 시기에 노동집약적인 작가의 작업은 더 눈길을 끈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작가라는 말보다는 창작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창작자의 작업에 늘 고통과 인내가 전제돼야 한다. 향불 작업은 고되지만, 내겐 하나의 수행 작업이기도 하다. 세상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머릿속을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새 창작에 대한 욕구도 뜨겁다. 작가는 “또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형식도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과거 작업은 색이 매우 강했는데, 현재는 그때와 비교해서는 연해졌다”며 “변화하지 않는 작가는 생명력을 잃는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도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화면 안에 남성과 여성이 중첩되거나 불분명한 국적의 인종과 연령대의 인간 군상이 겹쳐 보인다. 사진=김금영 기자

선화랑 측은 “작가는 하나의 밑그림을 그린 후 향으로 그것을 태우며 소멸시키고, 사라진 흔적을 다시 다른 그림과 배접해 새로운 형상을 재구성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단일 이미지가 아니라, 겹겹이 중첩된 다층적 내러티브와 철학적 깊이를 가진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다시 한 번 인간 서로의 관계성을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낀다. 인류는 점점 더 초고속, 초근접한 커넥션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며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세력만으로는 결코 존재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어떠한 관계성을 만들어가며 개인의 삶을 영위하고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야 할지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동시대의 화두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인간의 형상 속에 삶과 사회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인간상을 풀어내며, 예술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전시는 선화랑에서 7월 26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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