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갤러리, 정현 ‘그의 겹쳐진 순간들’… “드로잉·조각에 첫 감정 던지다”

정현 작가의 지난 30여 년 예술 궤적과 새로운 전환을 보여주는 서베이 전시…1991년부터 2025년에 걸쳐 제작된 조각과 드로잉 총 84점 공개

안용호 기자 2025.10.24 07:42:47

전시 전경. 사진=PKM갤러리
전시 전경. 사진=PKM갤러리

“큰 틀로 보면 제 작품들은 드로잉이나 조각 모두 무엇을 이렇게 그린다, 또는 만든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가지고 있던 감정들을 그냥 던진다는 기분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PKM갤러리에서 만난 정현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첫 감정이 갖고 있는 순수한 모습을 드러낼 때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작가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작품에 던져낸다는 것이다.

PKM 갤러리는 10월 22일부터 12월 13일까지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정현의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지난 30여 년 예술 궤적과 새로운 전환을 보여주는 서베이 전시로, 1991년부터 2025년에 걸쳐 제작된 조각과 드로잉 총 84점이 공개된다. 긴 시간 작가가 축적한 예술 실험을 응집하고 또 다른 도약으로 분출하는 본 개인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격변의 현시대에 존재 본연의 모습과 그 본질적 가치를 숙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정현 작가.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정현 작가는 그동안 청주시립미술관, 남서울시립미술관, 성북구립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네 번의 미술관 전시를 해왔다. 그리고 PKM갤러리 전속 작가가 되어 다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게 됐다.

작가의 작업은 ‘인간’에서 출발한다. 1990년대 초, 그는 삽이나 각목 등을 도구로 사용하여 원재료인 흙의 물성과 작가의 감각적인 표현이 균형을 이루는 독창적인 브론즈 인물 조각을 선보였다. 그 후,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점차 소재나 물체 등의 다른 존재로 확장되어, 침목, 철근, 숯 등 오랜 세월을 머금은 재료를 통하여 물질의 속성과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번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에서 정현은 작업의 시작점이었던 ‘인간’으로 회귀하여 이를 다시 이어 간다. 최초 공개되는 브론즈 두상 신작에서 흙을 사방에서 힘껏 쳐 압착한 형상은 강하게 다져진 내면의 에너지를 상기시키는 한편, 백색 표면은 다른 것이 더해지지 않은 인간 본연의 상태를 환기한다. 인물상의 두 눈 속에는 지나간 삶의 무수한 장면들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이 담겨있다. 이와 함께 본관 전시장에 리드미컬하게 배치된 1990년대 초~2000년대 중반의 두상 조각들은 인간 존재가 겪어낸 삶의 시간과 굴곡을 성찰하게 한다.

정현 작가의 작품에는 크게 드로잉과 조각이 있다. 작가는 감정의 가장 첫 번째 것들을 드러내는 미술의 어떤 표현 방법으로서 드로잉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순수한 첫 감정을 잊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서는 드로잉이 가장 적합했다는 것이다.

전시 전경. 사진=PKM갤러리

그는 드로잉을 할 때 일반 물감 대신 콜타르를 사용한다. 석유의 찌꺼기인 콜타르는 쓸 데가 없어 도로포장이나 방수제로써 주로 사용된다.

작가는 “마지막 찌꺼기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막상 써보니 제조된 물감에서 나오지 않는 깊은 느낌이 있어요. 그릴 때는 막 붓이나 나뭇가지, 헝겊 등으로 만든 거친 붓을 사용하는데 정제된 것이 아닌 원초적인 느낌을 표현하기에 좋습니다”라며 콜타르와 막 붓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시 전경(침목으로 만든 인간의 모습).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전시 전경(무릎 꿇고 참회하는 인간의 모습. 그 안에 다시 일어설 힘이 보인다).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전시 전경.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정현 작가의 조각 작품들은 어떨까. 그는 조각의 질감도 감정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깎아내고 붙이고 석고를 뜨고 브론즈를 만들고 다시 석고에 흰색 채색을 한다. 주인공은 주로 인간이다.

사람의 형상을 한 침목으로 만든 작품이 눈에 띈다. 정현 작가는 철도 레일에 10년 이상 짓눌려 있던 침목의 ‘견딤’의 속성에 반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는 철길 옆에 살았다. 탱크나 장갑차 같은 싣고 가는 기차의 무게감, 공포뿐만 아니라 기차가 지나갈 때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리듬감을 기억한다. 무게와 시련을 견뎌내고 결국 소멸되는 침목에 작가는 매료됐다.

작가는 인체와 관련된 작업을 하면서 철학적 사유와 시적 상상력을 드러내고 싶었다. 1991년에 만든 그의 작품은 무릎을 꿇고 참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다시 일어설 힘이 스며있다.

전시 전경. 사진=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야외 정원에 설치된 신작 대형 조각은 청계천 수표교의 교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수표교는 조선시대에 수량 측정을 위해 청계천에 세워졌으나, 하천의 복개와 복원을 거치며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버려지듯 남아있는 상태이다. 작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수표교의 하단 교각에 주목하고, 별다른 기교 없이 무심하게 만들어진 형태와 다듬어지지 않은 돌의 표면에서 ‘세월을 견딘, 가장 한국적인 미감의 형태와 질감’을 발견한다. 그는 이 육중한 석조 교각을 3D 스캔을 통해 데이터로 변환하여 조합한 후, 알루미늄 조각으로 재탄생시켰다. 여기서 교각의 모양을 데이터상에서 잡아 늘여 만든 조각 상단의 물결과 같은 형태는 수표교가 원래 놓였던 하천이라는 장소의 상징성과 함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흐르는 시간과 역사를 상기시킨다.

전시 전경. 사진=PKM갤러리

정현 작가는 2023년 여수 장도에 머문다. 거기서 파도와 수많은 돌을 만난다. 뾰족뾰족 예민한 돌과 몽돌처럼 동글동글한 돌을 보며 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거대한 파도를 보며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즐겨 들었다. 갤러리 야외정원에 전시된 수표교 교각 모티브의 작품에는 말러의 물결이 청계천의 물결이 되어 잔잔히 흘러가고 있다.

“청계천에 있는 다리 중에 가장 오래되고 원형이 제대로 살아남아 있는 것은 수표교밖에 없어요. 수표교는 1958년에 청계천 2가에서 장충단 공원 입구로 옮겨졌지만 원래 세종2년 1420년에 만들어졌죠. 저는 돌의 질감과 형태에 집착하는데 수표교에서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요소들을 발견했습니다. 조각했는데 안 한 것 같고. 안 했는데 한 것 같은 것 말이죠. 전 세계에서 이런 미의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도성이 없어 보일 정도의 무의식적 감각이 중요한 우리나라 미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 전경. 사진=PKM갤러리

별관 전시공간에서는 대형 수표교 조각의 축소 모형들이 전시된다. 야외와 내부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마케트 작업은 스케일의 전환이 주는 낯선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 전경(고성 산불 당시 타버린 나무로 제작한 작업). 사진=PKM갤러리

전시장에 함께 놓인 숯 조각은 2019년 고성 산불 당시 타버린 나무로 제작한 작업으로, 작가는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다한 나무를 죽은 몸에 화장(메이크업)하듯 다시 불로 정성스레 다듬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장례 행위를, 얼굴을 단장하는 화장으로 확장하여, 작업의 몸체에 흰 분을 입히듯 마지막 모습을 매만졌다.

그리고 전시장 전관 곳곳에 펼쳐진 드로잉들은 대부분 석탄이나 석유를 증류할 때 생기는 찌꺼기인 콜타르를 사용한 작업으로, 작가의 몸짓과 감정, 사유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정현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금호미술관, 김종영미술관,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 등에서 열린 20여 회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다수의 전시를 개최했다. 2024년 제2회 김복진미술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 제28회 김세중조각상,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04년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상 등을 수여 받은 바 있다. 그의 작업은 리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대미술관 등 유수 미술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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