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체코 수교 35주년을 기념해, 아르누보의 거장 ‘알폰스 무하’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알폰스 무하: 빛과 꿈’전 현장이다.
체코 정부·EU 반출 허가 국보 11점 등 공개
체코 공화국 남모라비아 지방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는 자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20세기 전환기에 근대 디자인의 토대를 마련한 국제적 예술운동 ‘아르누보(Art Nouveau)’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무하는 1890년대 파리에서 제작한 포스터 작업을 통해 시각 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매혹적인 여성상,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 치밀하게 계산된 화면 구성을 결합해, 단순한 미적 아름다움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는 강력한 시각 언어를 완성했다. 이러한 독창적인 양식은 ‘무하 스타일’로 불리며 현대 광고예술과 시각문화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는 이런 무하의 예술세계를 전방위적으로 살핀다. 무하의 예술철학과 유산을 보존·연구하는 공식 신탁기관인 ‘무하트러스트’가 소장한 패밀리 컬렉션에서 엄선된 유화 18점을 비롯해, 무하의 상징적인 석판화·드로잉·조각·보석·소품 등 총 143점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
알폰스 무하의 손자이자 무하트러스트 대표인 존 무하와 대행 큐레이터 도모코 사토가 전시 기획에 직접 참여했다. 전시 측은 “프라하에서도 보기 어려운 유화 18점을 체코와 런던에서 특별 공수했다”며 “석판화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익히 알려진 무하의 작품 중, 회화적 감수성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유화를 감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체코 국보로 지정된 작품 11점은 이번 전시를 위해 체코 정부와 EU의 반출 승인을 받은 작품들로, 주한체코대사관과 무하트러스트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성사됐다는 설명이다. 또한 유화 ‘희망의 빛’, ‘슬라비아’, 조각 작품 ‘자연의 여신’을 포함한 작품 70여 점을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프라하의 ‘무하 하우스’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무하 하우스는 3대째 무하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개인저택으로, 미공개 작품과 습작, 그리고 화가 폴 고갱이 연주하던 하모니움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무하의 손자인 존 무하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와 함께, 작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담은 영상이 더해진다.
파리 시절부터 시작된 ‘무하 스타일’
전시는 크게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전시의 전반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장식 예술가’로 불리던 파리 시절에 초점을 맞춘다.
섹션1은 ‘사라 베르나르와 연극 예술’은 무하가 파리 시절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1844~1923)를 위해 제작한 첫 포스터 ‘지스몽다’(1894)에서 시작된다. 중세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지스몽다는 빅토리앙 사르두의 희곡을 바탕으로 사라 베르나르가 직접 제작·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첫 작품이다. 1895년 새해 첫날 파리 전역에 걸린 지스몽다 포스터는 화제가 됐고, 이 성공을 계기로 베르나르는 무하에게 6년간의 전속 계약을 제안했다. 무하는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 예술감독으로서 의상, 장신구, 무대장치까지 총괄하는 역할까지 맡으며 추가 포스터 6점을 제작했다.
섹션2 ‘무하 스타일-소통의 예술’은 지스몽다의 성공 이후 수많은 광고 포스터를 의뢰받은 무하의 행보를 살핀다. 특히 1896~1902년 파리에서 제작된 광고 포스터와 장식 패널을 중심으로 ‘무하 스타일’의 전개 과정에 집중한다. 작품들을 자신의 미학적 이상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장이자, 더 나아가 보편적 시각 언어로서의 그래픽 스타일을 통해, 대중과 더 넓게 소통하고자 한 무하의 작업 세계를 조명한다. 풍성하게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무하의 상징적 여성 이미지를 표현한 ‘욥(JOB)’을 비롯해 컬러 석판화 ‘백일몽’, ‘황도 12궁’ 등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는 무하였지만, 그 영광의 이면을 섹션3 ‘1900년 파리’가 들여다본다. 19세기 마지막 해에 열린 제5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무하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의뢰로 오스트리아 전시관 홍보 포스터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장식디자인을 맡았다. 그러나 무하에게 이 영광의 무대는 역설적으로 유럽 문명의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어두운 현실을 마주하는 계기가 됐다.
발칸반도로 현장 조사를 떠난 그는 그곳에서 남슬라브인이 겪는 문화적·정치적 어려움을 직접 목격했다. 제국을 위해 일하는 자신과 달리 동족 슬라브인이 오스트리아 통치 아래 고통 받는 현실은 깊은 아이러니로 다가오며 무하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을 안겼다. 그는 모든 슬라브민족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공동체적 유대와 억압에 맞선 투쟁을 그릴 ‘슬라브 서사시’의 창작을 자신의 필생 과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정체성과 예술적 사명을 성찰하기 위한 ‘자화상’을 비롯해 체코의 국보이자,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될 교회 장식으로 계획된 작품이었던 ‘백합의 성모’ 등이 이 섹션에 전시된다.
조국을 위한 무하의 행보는 섹션4 ‘조국을 위하여-빛으로 되찾을 조국의 꿈’에 더 상세하게 드러난다. 무하는 장기 구상 중이던 대작 슬라브 서사시 실현을 위해 1904~1909년 사이 다섯 차례에 걸쳐 미국을 찾았고, 이 시기 시카고 출신의 자선가이자 사업가 찰스 리처드 크레인(1858~1939)을 만났다. 그는 이후 슬라브 서사시의 주요 후원자가 된다.
이 섹션의 전반부에서는 무하의 미국 시절과 크레인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다루며, 후반부에서는 귀국 이후 체코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을 조명한다. 여기엔 국가를 위한 첫 공공 프로젝트였던 프라하 시민회관의 장식 작업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무하가 슬라브 세계에 대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들이 포함된다. 체코의 국보인 ‘대지를 깨우는 봄’, ‘슬라비아’ 등을 볼 수 있다.
‘슬라브 서사시’에 담은 인류애
후반부에서는 무하가 파리를 떠나 조국 체코로 돌아와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 정점에 위치한 슬라브 서사시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담은 20점의 기념비적 연작으로, 무하 예술의 사명감과 인류애가 응축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섹션5 ‘슬라브 단결을 위한 기념비’는 슬라브 서사시에 초점을 맞춰, 무하가 다양한 습작과 스튜디오 기록 사진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해 나간 과정을 조명한다. 20점의 대형 캔버스로 이뤄진 이 연작 중 가장 큰 작품은 가장 큰 작품은 세로 6m, 가로 8m에 이른다. 무하는 고대에서 중세, 종교 개혁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슬라브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준 역사적 장면 20개를 선정했다. 이 중 10점은 체코 역사에서, 나머지 10점은 다른 슬라브 민족의 과거를 소재로 해 정치, 전쟁, 종교, 철학, 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마지막 섹션 ‘희망의 빛’은 인류애를 향한 무하의 비전을 엿본다. 1938년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를 프라하 시에 기증한 지 10년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폴란드, 헝가리로부터 국경 지역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는 등 유럽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섹션에서는 이처럼 급변한 정세 속 또 다시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에 무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본다. 무하는 인류를 위한 기념비를 구상하며, ‘이성’, ‘지혜’, ‘사랑’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가 조화를 이뤄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는 미래를 그려냈다.
전시 측은 “무하는 예술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추구했다”며 “그가 평생 지향한 ‘예술과 삶의 조화’의 비전은 이번 전시를 통해 세기를 넘어 다시 살아 숨 쉬며, 아름다움과 신념이 공존하는 깊은 울림을 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달 8일 개막한 전시는 내년 3월 4일까지 현대백화점 더현대 서울 알트원(ALT.1)에서 펼쳐진다. 전시가 열리는 알트원은 2021년 2월 26일 더현대 서울 오픈과 함께 1호 전시를 열었다. 11호 전시 종료를 기준으로 유료 관람객 100만 명을 달성하면서 연간 약 30만 명의 고객이 찾는 예술작품 향유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알트원은 전문 전시관 수준의 항온·항습 시설과 보안 시스템 등을 갖춘 대규모 상설 전시 공간으로, 차별화된 콘텐츠로 주목받았다. 앤디 워홀의 대규모 회고전인 ‘앤디 워홀 : 비기닝 서울’을 비롯해 포르투갈 사진작가 테레사 프레이타스의 국내 최초 전시를 유치했고,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소장품 120여 점으로 구성된 ‘폼페이 유물전 – 그대, 그곳에 있었다’를 여는 등 총 11번의 전시 동안 알트원을 거쳐간 작품은 1500여 점에 이른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