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의 눈] 고전적 모티프가 시대를 움직이는 방식

불가리 ‘세르펜티’와 천경자의 ‘뱀’

류지민 서울옥션 럭셔리&파인아트 스페셜리스트 기자 2025.12.02 13:14:50

류지민 서울옥션 럭셔리&파인아트 스페셜리스트

최근 미술과 럭셔리 시장을 함께 살펴보면, 자기만의 고유한 시그니처 이미지를 구축할수록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작품이나 제품 자체를 넘어,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즉시 떠오르는 시각적 언어를 갖춘 브랜드와 작가가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미술과 럭셔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다루지만, 상징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는 점에서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이런 이미지는 오래된 신화와 역사 혹은 미술을 관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해오며 오늘날의 미술과 럭셔리 마켓에서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된다. 특히 ‘뱀’은 두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며, 시대의 감수성과 맞물려 새로운 맥락을 생성한다.

뱀은 고대 문명에서 지혜, 재생, 위험 등 서로 다른 개념들을 동시에 담아낸 입체적인 상징으로 활용돼 왔다. 불가리의 ‘세르펜티’는 뱀이 럭셔리 하우스의 아이콘으로 어떻게 재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48년 첫 모델이 등장한 이후, 세르펜티는 이탈리아 금 세공 전통에 그리고 관능적인 감각을 결합한 독자적인 언어로 발전해왔다. 특히 1950~60년대 ‘돌체 비타(Dolce Vita)’ 시대를 거치며 이 모티프는 단순한 장식적 요소를 넘어, 자기 확신과 표현, 권력성을 상징하는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세르펜티의 조형적 특징은 뱀의 직관적인 표현에 집중하기보다 그에 담긴 유연성과 감각적 흐름을 기술적으로 해석해냈다는 데 있다.

금속을 유연하게 구부러지도록 만든 튜브 구조, 비늘을 구현하는 방식, 착용자의 손목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변하는 관절 장치 등은 뱀이라는 고대의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불가리는 뱀을 ‘시대를 관통하는 상징’이자 ‘기술적 완성도’의 증거로 삼았고, 그 결과 세르펜티를 브랜드의 핵심 아카이브로 구성하는 아이콘으로 확립했다.

미술·럭셔리 마켓서 순환과 재생 반복하는 ‘뱀’

불가리(Bvlgari), ‘세르펜티(Serpenti Scaglie Bracelet)’. 사진=서울옥션

반면 천경자의 뱀은 물질적 형태보다는 감정의 구조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화려한 채색과 장식적 선, 감각적인 표현으로 구성된 그의 화면 속 뱀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도구다.

천경자에게 뱀은 공포나 위협의 존재라기보다 여성적 생명력, 고독, 욕망, 그리고 생존의 감정적 층위를 응축하는 기호에 가까웠다. 그의 작품에서 뱀은 인물과 얽히거나, 배경의 패턴으로 스며들거나, 혹은 화면의 구조를 형성하는 장치로 등장하며 작가의 삶과 경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언어였음을 보여준다.

즉, 남성과 사회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의 내면적 감정·몸·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뱀은 필연적으로 선택된 기호였다. 단순히 작가의 외부 세계의 생명체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살아오며 마주한 자기 감정의 밀도를 시각적 형태로 치환한 결과물이다.

흥미로운 점은 불가리의 세르펜티와 천경자의 뱀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비롯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사적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상징적 구조를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뱀 모티프가 지닌 순환과 재생은 세르펜티에서는 ‘시간을 감는 구조’로, 천경자에게는 ‘감정과 삶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천경자, ‘생태’. 종이에 채색, 51.5×87㎝.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서울옥션

또한 뱀이 지닌 관능적인 에너지와 내면의 감성이 지닌 양면성 역시 두 세계 각자에 녹아 있다. 세르펜티는 외향적 에너지 즉. 관능, 힘, 자기 확신을 드러내지만, 천경자의 뱀은 고독, 감정의 층위, 자아의 단단함과 같은 내향적 에너지를 시각화한다.

결국 두 계보는 뱀이라는 상징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 존재, 시간을 다룬다는 공통 맥락을 가진다. 그리고 이 지점은 상징이 시대와 매체를 통과하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상징의 반복은 단순히 과거를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 시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무리되고 있는 뱀의 해, 을사년. 올해의 끝에서 뱀이라는 상징을 다시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지금, 뱀은 순환과 재생을 반복하는, 변주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상징이다.

불가리의 세르펜티가 다시금 주목받는 현상, 천경자의 작품이 새로운 세대의 컬렉터에게 재해석되는 흐름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예술과 럭셔리는 언제나 시대의 기호를 포착해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왔다. 을사년 끝자락에 닿은 지금, 불가리와 천경자가 만들어낸 두 개의 계보는 상징의 지속성과 현대적 해석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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