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비 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해 묻다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무욕의 세상으로 나아가다

왕진오 기자 2012.02.12 08:39:35

낯선 땅 이국에서 '나는 누구인가' '살아 있음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달고 살았던 아티스트 데비 한(43)은 동양과 서양의 '가치'의 문제, 특히 '미'와 '예술'에 대한 상대적 가치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데비 한에게 있어 자신과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삶의 본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한 끊임없는 지속적인 질문과 회의는 작가의 작업을 움직이게 했고 사물과 현상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벗어나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균형 있는 태도를 보인다. 하나의 사상이나 시공에 고정되지 않으려는.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무욕의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삶의 태도의 원동력이 됐다. 데비 한 작업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이곳에 대한 현실 인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현실과 기존의 가치에 대한 비판적 지지, 극복·반대·증폭·확장의 몸짓이다. 그의 작업에는 기성가치에 대한 포스트적인 기운이 강하게 배어 있다.

2003년 말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7년 동안의 한국 작업과 미국시절의 지난 작업이 한자리에 모았다. 10일부터 3월 18일까지 성곡미술관에서 진행되는 '비잉(BRING):데비한1985-2011'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난 26년의 걸어온 발자취와 미래로 향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7년 동안의 한국에서의 작업과 미국시절의 지난 작업을 한자리에서. 함께 돌아보기 위해 60여 작품이 함께 한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구성됐다. 이민 초기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의 방황 시절인 LA시기(1985-1997). 대학원을 다니며 사회와 인간의 욕망구조 등 세상으로 눈을 돌린 뉴욕시절(1998-2000)과 LA시절(2001-2003).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방문했던 한국에서의 작업(2004-현재)이 그것이다. 데비 한은 명상을 통해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다. 그 해답 또한 자기 자신 안에 있었음을 알았다. 다시 찾은 한국에서 작가는 "실마리가 전통에 있었음을 알았다. 그 답이 모국 한국에 있었음을 알고 전통과 뜨겁게 조유하고, 끌어안는다"며 무모하리만큼 청자, 백자작업에 고집스럽게 몰두한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과의 소통을 위해 타인과의 소통을 하다 LA시절의 작업은 작가 자신에 대한 자기비판, 자기규정 등 자기정체성에 대한 집중 고민이 드러난다. 사고의 모더니즘적이고 환원적인 태도는 이미 초기, 청소년기를 거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페인팅과 드로잉 중심으로 자기내면탐구와 자기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질문을 구상표현적인 작업으로 풀어냈다. 강한 흑백 대비와 대단히 격정적이고 극적인 감정과 표현이 두드러진다. LA시절의 작업이 '자신과의 소통'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자신을 돌아본 것이라면, 뉴욕에서의 작업은 '타인과의 소통'을 향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 강조됐던 시절이었다. 변화와 갈들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태도의 변화가 보인다. 아름다움과 인간의 욕망, 특히 성욕 등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훗날 한국에서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한 작업으로 관심이 옮겨오는 징검다리가 된 시기였다. 데비 한 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리움이든, 미움이든,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든, 이국적인 감정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다시 찾은 낯선 한국에서 역시 낯선 창작스튜디오 입주 생활을 하며 데비 한은 차츰 미국과는 전혀 다른 한국의 매력을 발견해 나간다.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을 저울질하며 갈무리한 입주결과물을 선보인 첫 개인전 'Idealistic Oddity 2004)를 열었다. 한국의 미대입시제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작한 '지우개 드로잉'과 획일적으로 교육문화를 꼬집은 '아그리파 클래스'등을 선보이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데비 한은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형식의 신작들을 다수 선보인다. 미와 예술을 용도 폐기하듯, 투명한 박스에 박제화 하여 진열한 백자편, 전시 주제인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부식 청동 비너스, 전통과 현재, 서양의 별자리, 동양의 십이간지 등을 병렬시키면서 동·서양의 간극을 질문하는 서양식 자개테이블, 그레이스 시리즈를 사진이 아닌 영상 형식으로 변환, 소개하고 있는 영상 그레이스 등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금까지 이어온 지적 고민과 비전을 직접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작업을 통해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흔히 비너스 작가, 비너스를 비틀어버린 작업 등으로 알고 있는, 데비 한 작품에 드러난 외형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의미 있는 자리이다. <왕진오 기자>wangpd@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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